나의 아르바이트 이야기

고등학교 3학년부터 대학교 4학년때까지
나는 부단히도 아르바이트를 해왔었다.
대단한 학벌을 가지지 않앗기에 과외 아르바이트는 엄두를 못냈고
그저 건강한 몸으로 때울 수 있는 고소득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그때 남자들이 대부분 그러했었다.

 

1.
고향 원주에는 전국에서 가장 큰 삼양공장이 위치해 있다.
삼양공장에서는 정기적으로 대학생 생산직 알바를 채용했었는데
당연히 대학생들 사이에서 그 경쟁이 치열했었다.
삼양이었으니까.

라면 혹은 짱구, 사또밥, 카라멜 팝콘과 같은 인기 생산라인을 동경했었지만
나와 내 친구는 화려한 등빨 덕분에 간장 생산 라인에 들어갔다.
집에서 요리를 위해 쓰는 집-간장이 아니라
대형식당에서 쓰는 20L 이상이 담기는 커다란 흰색 플라스틱 용기가 가득찬 삼양간장 생산라인.

그 겨울내내
나는 쉴새 없이 쏟아지는 간장소스를 담기 위해 그 커다란 통들을 날랐었고
집에 가서 아무리 샤워를 해도 냄새가 지워지지 않았던 그 간장냄새가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2.
다음해에는 일산인가 파주인가 가구공장엘 가게 되었다.
그곳에는 합숙을 위한 목조 가건물이 있었고, 그곳의 위생은 최악이었다.
밥을 먹기 위해서는 왼손을 계속 휘저어야 파리가 앉지 못할 정도였으니까.

더 큰 수모는 목수들로부터 대학생이란 이유로 알 수 없는 괴롭힘을 당했다.
(가구접합을 위해서) 목재용 공업용 본드를 장갑이나 도구를 쓰지 않고,
그냥 손으로 펴서 붙이라는 지시를 받았었는데 그 기억이 아직도 잊혀지질 않는다.

‘왜 대학생이 이런 쉬운걸 못하냐’는 욕설을 수시로 받았었다.
동남아 외국인들이 받는 부당한 처우가 이와 같을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그때 처음으로 했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도 희한한게 그 사람들에 대한 미움의 감정이 전혀 없다.
결국 나는 그 가구공장에서 오래 버티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옮겼다.

 

3.
제대 후 1997년도의 그 여름은 정말로 너무 더웠다.
35도를 넘나드는 더위에 열대야가 계속 되었던 그런 날씨였다.
그때의 아르바이트는 건설현장에 있는 컨테이너 박스에서 기거하면서
성산대교와 그 남단에 있는 강변북로쪽에 있는 자전거 도로 만들기였다.

땀은 연실 쏟아져 옷은 아예 젖어 있었고 속옷은 축축하기 일쑤였다.
레미콘차에서 시멘트는 계속 쏟아져 내리고
장화를 신고 날카로운 철근을 들어 그 시멘트 안에 넣어 밟는 일이 계속이었다.

그때 그 철근에 까인 상처는 아직도 내 팔에 남아 있어
그 상처를 볼 때마다 그때의 그 여름을 생각나게 한다.
너무 힘이 들어 밥도 먹지 못하고 물만 줄곧 먹었다.

그렇게 강도높은 노동을 마치고 들어간 컨테이너 숙소 안은
찜질방을 연상케 했을 정도로 온도가 높았으나 어쩔도리가 없었다.
너무 힘드니 그냥 몸이 쓰러져 자는수밖에…

죽을 것 같았던 그 하루하루의 노동은
일주일로 이어졌고, 그 일주일은 한달로 이어졌다.
그렇게 그렇게 버텼더니 그 해 여름이 다 지나갔다.

 

4.
그 다음부터는 인테리어 현장의 잡부로 많이 다녔는데, 그 벌이가 쏠쏠했다.
현장에서 목격한 목수들의 기술과 그리고 그들이 받는 보수가 꽤나 높았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 현장은 시간으로 하루 일당을 계산하는데..
이를 테면 이런 식이었다.
오후 6시까지가 정규근무시간이고
9시까지 초과근무를 할 때는 1.5배를 받고 12시가 넘으면 2배를 받는 방식이다.

나는 기술이 없는 일반 잡부라 그들이 하는 대로 따라해야했으나
나는 은근히 매일 12시가 넘기를 고대했었다.
그래야 나도 2배를 받을 수 있으니..
그렇게 한달을 12시까지 노동을 했던 것 같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니 머리가 어지럽고
쏟아진 코피가 멈추지 않아 일을 나갈 수가 없었다.
놀란 사촌누나와 매형이 억지로 쉬게 했는데 나가서 받아야 할 돈을 못받는다고 생각하니
내 몸이 축나는건 생각하지도 않고 억지로 그렇게 그렇게 나가서 일을 했다.
돈독이라는 단어를 배운 그 해 여름은 그렇게 또 지나갔다.

 

5.
우리집이 그리 부유한 경제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때의 대학생들이 누구나 한번쯤은  다가 본다는 유럽여행은 꿈도 꿀 수 없었다.
하지만 이 기회가 아니면 해외여행을 전혀 가지 못할 것 같아
일본배낭여행을 가기 위해 마지막으로 편의점 알바를 시작했다.

남자라 당연히 야근 근무를 했었다.
처음에 힘들게 했던 밤잠은 시간이 지날수록 익숙해 졌으나
취객들과 실랑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힘들기만 했다.

수시로 배달입고되는 물품들과 아이스쿨러의 디스플레이 그리고 POS기를 통한 금액정산.
또 다른 강도높은 일들의 연속이었다.
아침에 퇴근해서 자는 잠은 숙면이 될리가 없었고
그렇게 낮과 밤이 바뀐채 살아갔던 그 몇 달은 몽롱함 그 자체였다.

넉넉치 못하게 가지고 간 배낭여행은 힘들었던 기억뿐이었다.
도쿄에서 최소 5구간은 그냥 도보로 이동해 다니고
물가가 너무 비싸, 항상 세일을 했던 우유만 마시고 다녔던 탓에 설사만 계속 했었던 도쿄 배낭여행.
그래도 그 여행이 재미있었다.

 

6.
나 역시 오토바이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근네 나는 어렸을때라기보다는 대학교 4학년때 했으니
다른 배달 아르바이트들 보다 한참이 늦었다.

그때 처음으로 피자배달을 위해 오토바이를 타게 되었다.
오토바이 작동은 의외로 쉬웠고 배달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동네의 아줌마들이 하도 극성이라 그 컴플레인들과의 싸움이 제법 힘들었고
비오는 날 밤의 오토바이 배달을 무서워 했던 그 기억만 남아있다.

 

7.
대학교 3학년 때인가..
친구가 출장뷔페 아르바이트를 소개해주었었다.
그곳으로 가니,
무슨 지하에서 온갖 요리를 다해서 그걸 연회장으로 나르는 아르바이트였다.

냉장고에는 온갖 음식물 재료들이 가득했고
몇 명 안되는 요리사들은 종류에 관계없이 모든 요리들을 다 만들어 냈었다.

지금 기억나는 건
그 지하의 계단이 너무 가파랐는데
그 계단을 이용해 300장의 접시가 담긴 박스를 나르는게 가장 고역이었다.

그리고 음식은 너무 뜨거워
그 가파른 계단에서 쏟기라도 하는 날은 대형사고로 이어지기가 일쑤였다.
그때 무거운 짐을 나르느라 허리를 많이 다쳤지만
맛난 음식을 많이 먹을 수 있고 보수도 좋아 아주 만족스럽게 다녔었다.

 

8.
그러고 보니 폐지줍기 아르바이트도 있었고,
병원건설 현장에서의 아르바이트도 있었고
신문배달 아르바이트도 있었고,
워드 아르바이트도 있었고,
나래블루보드 서포터즈 아르바이트도 있었고…
나름 다양한 아르바이트들이 있었구나.
나의 20대는 그런 아르바이트로 채워져 있었구나.

 

9.
내 대학생활의 반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아르바이트들의 경험들로 인해
생활력이라는 능력수치를 많이 올릴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아르바이트들은 사회에 대한 간접경험을 많이 제공해 준 거 같기도 하고..
그것들이 어떤 식으로 구체화 되어 내것이 되었는지 표현할 수 없지만
그 경험들이 무의식으로 녹아져들면서
사회생활에 필요한 센스들을 갖추게 해주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그 일들로 인해 책임감과 근면함이 더 키워진 것도 같고.

처음에는
지금의 이글들을 적으면서 뒤돌아 본 그 때의 그 기억들이..
자랑스럽지도 않고, 후회스럽지도 않고…
그냥 그저 담담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나를 나름대로 성장시켰던 사회훈련 중 하나였던 것 같다.
내 20대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아르바이트의 소중함.
그 소중함을 잊고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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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dymiae

글쓰기를 통해 내적 평안함을 얻는 경험을 종종 하고 있습니다. 이 곳에서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진솔하게 글을 쓰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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