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밥의 재발견

여러분들은 혼자 식사할 때가 종종 있나요?
그렇다면 혼자 식사할 때는 어떻게 먹는지요?

나는 언젠가부터 식사를 할 때,
무언가를 보는 습관이 생겨져 버렸습니다.
예전에는 신문을 봤었고,
또 한 때는 만화책을 봤었으며 지금은 스마트 폰을 보며 식사를 합니다.
그 시작이 어떻게 시작되었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네요.
막연하게나마 동시에 하면서 시간을 절약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부터였나 봅니다.

나의 과거를 돌이켜보면 식사라는 개념은 단순했어요.
그저 한 끼의 배고픔을 때우는 섭취하는 행위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정도니까요.
이 표현이 너무 본능적이고 직설적이라 조금은 귀에 거슬리더라도 말이죠.

어렸을 때부터 가족이 둘러앉아 함께 식사를 함께한 기억이 많지 않습니다.
명절 차례상이나 제사 때 밥상을 제외하고는.
심지어 생일날 식사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암튼 나의 성장기에는 식탁에 앉아 함께 음식을 즐기는 법을 훈련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최근에 집에서 혼자 밥을 먹을 기회가 생겼는데 아무것도 보지 않고 밥을 먹게 되었습니다.
의도적으로 상황을 연출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되어버렸어요.
그 상황의 느낌이 조금은 낯설기도 하고 신선하기도 했지만
낯섬을 억지로 피하기 위해 스마트폰을 챙기거나 만화책, 소설책을 챙기지는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보지 않고 식사를 하다보니 본의 아니게 음식에 집중하게 되더군요.
씹으면서 식탁 위에 차려진 밥상의 밥과 반찬들을 더 보게 되고
내가 씹고 있는 맛을 느끼는 시간이 더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내가 먹는 한 끼의 식사가 더 맛나게 느껴졌습니다.
‘내가 너무 기본적인 것을 잊고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함께 들었지요.

사회생활을 하면서 더 바쁘게 더 많은 활동들을 동시에 하려는 의식이 몸에 배다보니
식사 역시도 그런 의식에 영향을 받아 그 본질의 의미가 없어져버렸었지요.
팟캐스트를 통해 들었던 철학자 강신주 박사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당신은 사료와 식사의 차이를 알고 있는가?’라는 화두를 그는 던집니다.
‘사료는 먹어야 된다는 느낌으로 먹는 것, 불편함을 감내하지 않으려 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혼자 있을 때 대충 라면으로 때우거나 설겆이를 최대한 줄이겠다는 생각으로
섞어 먹거나 반찬통을 냉장고에서 그대로 꺼내 먹는다거나
배고프니까 나중을 위해서 먹어야한다는 생각으로 먹는 것이다.’
‘이에 반해 식사는 불편함을 기꺼이 감내하려고 하는 것을 말한다.
먹는 것 자체보다 같이 먹는 사람이 중요하다.
내가 아끼는 사람이 우리 집에 왔을 때, 반찬을 접시에 덜어 담고, 라면도 그릇에 덜어서 담는다.
즉 정갈하게 차려서 먹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은 이렇게 말했다.

“누군가와 식사를 함께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의미다”라고.
처음에는 그저 한 끼의 식사를 하면서 딴짓을 하는 것에 대한 사유가 일어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점차 글을 쓰다보니
지금까지 내게 식사란 그저 한 끼의 식사를 때운다는 생각일 뿐이었고
그 한 끼의 때움이 끝나자마자 자리를 뜨는 것이 나의 식사였다는 것을.

강신주 박사의 말에 의하면
나는 지금까지 사료를 먹고 있었던 것일뿐이었습니다.
건강을 생각한답시고 칼로리나 영양식만 생각할 줄 알았지
정작 사람이 사람답게 먹는 한 끼의 식사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이 없었음에 대한 부끄러움이 내 마음 속에서 일었습니다.
어쩌면 나는 너무나 기본적인 것들을 많이 잊고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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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dymiae

글쓰기를 통해 내적 평안함을 얻는 경험을 종종 하고 있습니다. 이 곳에서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진솔하게 글을 쓰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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