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과 무기력, 그리고 피로

만약 내가 정년을 보장받는 직업이 있었다면
나는 1인기업가의 꿈을 향한 길을 걷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내 직업이 지위로나 경제적으로나 각광받았다면
나는 와우라는 문을 두드리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부모님이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지원해 주셨다면
나는 유니컨을 고민하지 않았을겁니다.

다른 이들은 자기성장과 멋진 비전을 창조하기 위해 1인기업가의 길을 걸었지만
나는 지금껏 그래왔듯 내 앞가림을 스스로 해야 했기에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떠밀려 1인기업가의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나는 IT와 관련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정확히는 WEB이라는 분야에서 일을 하고 있으며
기업용 웹사이트를 제작하는 회사를 다니고 있습니다.
제안서를 쓰고 기획자들과 함께 제작할 웹사이트를 설계하고
디자이너들과 함께 논의하여 나온 결과물을 클라이언트에게 납품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10년 동안의 이 일들은 나를 즐겁게 했고 만족스럽게 했습니다.
난 지금도 이 일이 좋습니다.

하지만 기술의 트렌드는 빨리 변하고, 전문성은 점점 세분화되어가고 있습니다.
새로운 기술표준과 직종들이 계속 생겨납니다.
이곳에서 버터낼 자신이 점점 없어집니다.
무엇보다 이 일이 지겹게 느껴집니다.
10년 이상씩 하는 일에서 일에 대한 보람이 느껴지지 않으며
‘내가 점점 성장하고 있구나’라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이제는 더 이상
남이 하고 싶은 서비스를 대신 만들어 주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서비스를 내 손으로 직접 만들고 싶습니다.

디자인 스튜디오에서의 5년간의 정규직 근무를 마친 후부터는
정규직이라는 직장생활에 대한 시각이 바뀌어졌습니다.
직업적 역할이 그저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요소(UNIT)일 뿐
팀워크나 동료애 없이 기업과 개인의 비전을 그려가는 기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 후부터 나는 다른 근무형태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와이프가 나를 만났을 때 가장 먼저 이런 느낌이 들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저 사람은 직업도 별로고 돈도 많지 않은 거 같은데 왜 저렇게 자신감이 넘쳐하는지를 모르겠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장인어른/장모님께 소개할 때도 그렇게 설득했다고 하네요.

시골에서 상경한 그저 그런 평범한 샐러리 맨에게 다섯 딸 중에 장녀를 맡겨야 하니
그 말이 먹힐 거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내 아내는 나에게 자신감 충만한 남자라는 칭찬을 참 많이 했었습니다.
이제는 내 스스로가 그런 자신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런 때가 있었나’라는 회상의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시기적으로도 그렇고 환경적으로도 그렇고 위치적으로도 그렇고
가장으로써의 역할을 더 충실히 해야한다는 사실이 점점 더 부담스럽게 느껴집니다.

더 솔직히 이야기 하면
지금보다 더 많이 돈을 벌어와야 한다는 사실이 나를 숨막히게 합니다.
내가 즐겨보는 TV 프로그램에서 어느 닥터가 이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의사들이 돈을 많이 벌어오는 줄 다들 알고 있는데,
의사들뿐만 아니라 남자들이 벌어오는 수익이 크면 클수록 자기 수명이랑 바꿔오는 거라 생각하면 된다’고 했던

그 말을 듣는 순간 작년에 나를 힘들게 했던 그 프로젝트의 힘겨움이 떠올라 잠시 울컥했었습니다.
나는 잠시 다른 방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앞으로 2주까지만 현재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를 마감하고
나는 지금의 회사를 떠납니다.

다른 프로젝트를 찾기 위해 프리랜서의 신분으로 직접 일감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웬지 쉽지 않겠다는 예감이 듭니다.
운이 없다면 한 달간은 그냥 보낼지도 모르겠지요.
(벌써부터 은행대출이자 및 각종 공과금과 보험 따위를 생각하니 골이 아프네요.)
와이프는 이런 사실을 모릅니다.

나는 내 성정상 이런 사실을 잘 말하지 않습니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지만, 고민과 슬픔을 나눈다고 배가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예요.
내가 겪고 있는 힘겨움을 구지 상대방도 똑같이 느끼게 싶지 않지만
와이프는 다르더군요.
내가 겪고 있는 불안을 이야기 해주는 걸 그녀는 원합니다.
이 때문에 많이 다투기도 했었어요.

어쨌든 여느때보다 많은 불안을 느끼고 있는 요즘입니다.
300일 새벽기상을 시작으로 자기여정을 걷기로 한 그 전이나 지금이나
불안을 느끼는 건 여전합니다.
불안 자체가 없어지진 않았습니다.

한데 지금의 불안에 대한 느낌이 좀 다릅니다.
설명하긴 뭣하지만 느낌이 묘해요.
예전 같았으면 그 불안때문에 잠도 못이루고 신경도 날카로와 졌을테고
모든 사고와 감정이 불안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을텐데
지금은 예전과 좀 다릅니다.
뭐랄까
담담해지는 느낌이예요.
나쁘게 이야기 하면 체념과 같은 느낌과 비슷한 거 같기도 해요.
‘그때 가면 달라지겠지’ 혹은
‘그때 고민은 그때하고 지금은 지금일만 생각하자’라는 느낌이 많이 듭니다.
요 몇 년간의 자기학습 효과가 나온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미봉책이든 감정의 컨트롤이든 어쨌든 다행입니다.
스스로 나를 미치도록 옭아매는 괴로움으로부터 나를 떨어뜨려놓았으니까.

성취를 갈망하는 나는
그 누구보다 무언가의 결과물, 랜드마크를 세상에 내놓고 싶어합니다.
랜드마크를 창조하기 위해서 동기도 부여되고 전략도 수립하며 자조력도 인내로 수행하는게 나입니다.
그 성취가 나를 존재하게 하고 나를 의미있게 만듭니다.
그게 바로 인디라는 사람입니다.

이런 내게 가장 큰 아킬레스 건이 있다면
그건 바로 회의론으로 빠지는 무기력입니다.
(피로일지도 모르겠군요. 팀장님이 예전에 이야기 한 그 책이 생각나네요)

예전의 숙제가 불안이었다면
요즘은 이런 무기력이 자주 느껴집니다.
그렇게 치열하게 매달렸던 자조력 훈련도 덧없게 느껴집니다.
‘어차피 작가가 되지도 않을터이고 내 한계를 내가 스스로 아는데 이걸 하면 뭐하나’,
‘<책을 이야기하는 남자> 마케팅 계획을 세우면 뭘 해. 성과는 여전히 바닥인걸’,
‘맨날 자기경영을 배워오고 책을 읽으면 뭘해, 여전히 관계는 삐거덕 거리기가 일쑤인걸..’

이런 생각이 들때면 모든 걸 다 내려 놓고 싶어지고
하루종일 아무것도 하기가 싫어집니다.
큰 확장일 수도 있겠지만
‘우울증으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살충동을 느끼는 사람들의 심정이 이런 류의 감정일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취도 다 귀찮고
성찰도 다 시끄럽고
관계도 다 필요없고..
다 내다 던져버리고 싶고 혼자 있고 싶습니다.

내가 짊어진 책임감과 도덕 그리고 성취과제들을 향해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소리로 쌍욕을 해주고 싶습니다.
‘다 꺼져버리라고…’

그리고나서 나도 저 멀리 사라지고 싶습니다.
지금 이런 글을 쓰거나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예전의 나였다면
어디서가 문제인지, 또 이 감정의 본질은 무엇일까라는 사유를 했을터이지만
이제는 그 조차도 귀찮네요.

귀찮아요.
지쳤어요.
그냥 쉬고 싶어요.

불안에 대해서 진솔하게 이야기를 쓰고 싶었는데
감정에 취했는지 아니면 무의식의 피로가 올라왔는지 글의 결말이 이상하게 나왔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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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dymiae

글쓰기를 통해 내적 평안함을 얻는 경험을 종종 하고 있습니다. 이 곳에서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진솔하게 글을 쓰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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