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사된 그의 모습에서 본 나의 분노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없는 답답함이 밀려왔습니다.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인데도
그를 계속 보고 있자하니
답답함을 넘어 부아가 치밀어 견디기가 힘들었습니다.
타인에게 이런 극단적인 감정을 느낀 게 얼마만인지.

폭풍같이 휘몰아친 감정의 소용돌이가 지나간 후
그에게 느꼈던 감정의 실체를 조용히 들여다보고 싶었습니다.
방에 있는 불을 끄고 오랜 만에 초를 켰습니다.
그윽한 초의 분위기가 방을 가득채워 준 탓에 쉽게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습니다.

‘나와 아무 상관 없는 그에게 그토록 분노했을까?’
‘어쩌면 그 감정은 투사된 내 모습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건이 떠올랐습니다.
수업시간 때, 시간관리에 대한 내 발표가 끝나고 나서
나를 가장 이해해 줄 알았던 그들이 내게 보였던 그 표정을.
그 표정으로 인해 나는 속으로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가 변한 건 3년 전, 시간관리 세미나를 듣고 난 후부터 변했다고 합니다.

퇴근을 하면 게임이나 TV시청으로 보냈었는데
시간관리를 통해 목표를 향한 계획을 세우게 되었으며
나중에는 자신이 계획한 대부분의 목표들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합니다.
그 후부터 그는 일상의 모두를 계획으로 시작합니다.
그가 청중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들고 온 플래너는 엄청난 두께를 자랑했습니다.

플래너 안은 선으로 반듯하게 그어져 있었으며
항목별로 총 천연색 형광펜으로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업무목표, 사업계획, 연봉 및 매출, 독서, 인간관계에 대한 다양한 계획들이
년도별로 세분화시켜 기록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30분, 1시간 단위로 섭취해야 할 음식물 계획까지 체크되어 있었고
가족과의 여행도 모두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나중에 아이들이 기억하지 못할 때 보여줄 용도라고 말했습니다.
일주일치 점심식단도 계획되어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 음식이 먹기 싫어도
계획에 있다면 억지로 먹는다고 했습니다.
매사에 즉흥성이 없는 그에게
아내와의 스킨쉽은 어떻게 하냐는 상대의 짖궂은 농담에도
그 부분 역시 계획대로 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90세까지 인생 로드맵을 계획해 놓고 있었습니다.
이런 플래너가 이민자용 대형 트렁크 가방에 꽉 찰 정도였습니다.
그에게는 중학교와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딸이 있습니다.
문제는 두 딸에게도 계획수립을 일상화 시키고 있었습니다.

딸이 나가 놀고 있을 때 그는 전화를 합니다.
‘지금은 공부할 시간이니 집에 들어와서 공부해!’

밖에서 친구들을 만나고 있을 때도 그는 딸에게 전화를 합니다.
‘지금은 TV를 볼 시간이니 들어와서 TV를 보도록 해!’
‘아니면 집에 와서 계획표를 고치고 가!’

딸이 아파서 학교를 가지 못하겠다고 해도 그는 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녀의 병은 더 커져버렸고 결국 조퇴를 하게 됐습니다.

그를 보며 성취지향적 폐해와
한쪽으로 함몰된 기질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삶을 바꿔놓은 시간관리는 어느 덧 자신에게 주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는 시간관리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계획은 삶의 경영을 돕는 도구일 뿐인데 그걸 모시고 사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답답하고 한심하다 못해 화가 났었던 모양입니다.

어쩌면 그건 과거와 현재 나의 모습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에게 더 화가 났었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전혀 저렇지 않아’
‘나는 저 사람과 다르다고’ 라고 부정하고 부정해 보지만,
내 마음 한 구석에 있는 찜찜함은 쉽게 지워지지가 않았습니다.

2013년을 위한 시간관리 발표를 마친 후,
내 발표를 측은하게 바라보았던 그들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아마 내가 그를 보며 답답해 했듯이
그들도 나를 보면서 지금의 나처럼 답답해 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에게 내가 그처럼 비쳐졌을 생각을 하니
내 가슴 속에는 진한 씁쓸함이 올라왔습니다.

씁쓸함을 달래볼 요량으로
끊었던 맥주를 마시기 위해 냉장고 문을 열었지만
손은 맥주캔을 향해 뻗지 못하고 냉장고 문만 잡은채
냉장고 안의 불빛 만을 한참 동안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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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dymiae

글쓰기를 통해 내적 평안함을 얻는 경험을 종종 하고 있습니다. 이 곳에서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진솔하게 글을 쓰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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