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햄릿

B

[01. 극작가, 셰익스피어]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고 셰익스피어에 관심이 일었다면 한 번쯤 셰익스피어의 일생이 궁금해 자료를 찾아봤을터인데, 의외로 그의 생에 대한 이러쿵 저러쿵 말들이 많다. 가상의 인물이라든지, 프랜시스 베이컨이 셰익스피어였다는 둥, 문학의 거장답지 않게 돈을 밝혔다는 둥, 그의 작품이 너무 과도하게 신성시 되어 있다는 – 왜냐하면 정작 셰익스피어가 창작한 작품은 몇 편에 불과하고 대개는 당 시대에 널리 알려진 소설이나 희곡을 각색했거나 특정 구절 등을 베꼈다는 비판 – 비평들을 찾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이런 질투나 비난은 셰익스피어가 이룬 명성이 워낙 거대한 탓에 따라올 수 밖에 없는 식자층들의 시기, 질투의 성격으로 봐야 할런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그가 죽은 후 그의 문학적 명성은 수 백년간 동안 절대적이었고 현재까지 이르고 있을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탑 만큼이나 강력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촌 어디에선가 그의 작품들이 상영되고 있을테니까. (악플도 관심이 있어야 달리는 법이다. 심지어 시골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 어머니도 그 이름을 들어봤을지도 모르겠다)

셰익스피어는 희곡을 만들었던 극작가다. 젊을 때는 단역배우를 한 경험도 있고 성공한 이후에는 <글로브>라는 극장을 소유한 소유주이기도 했지만 현대인들이 우러러보는 그의 정체성은 극작가로써의 위대함으로 보는 것이 적절할터이다. 극작가라 함은 오늘날 영화를 만드는 시나리오 작가라든지 드라마를 쓰는 작가와 같은 일 것인데, 단순히 작가라는 현대적 직업으로 매칭시켜 이해하기에는 많은 한계가 있다. 뒤에 다시 이야기 하기로 하자.

어쨌든 그가 쓴 4대 비극과 5대 희극은 신분과 이름 그리고 배경만 살짝 바꾸어 무대에 올려도 현대물과 크게 다를 정도가 없을 정도로 그의 작품은 현대인들에게 친숙하게 다가오는데, 그 힘이 있다. 인류문학의 힘이라고 불리우는, 시대를 결쳐 공유되는 인류적 보편성말이다.

<GLA-문학> 수업 중에서 나왔던 셰익스피어에 대한 비판 중 하나로, 그가 쓴 희곡의 대사들이 삶에서 사용되는 구어체가 아니라는 점을 들 수 있는데 이는 현대적인 상황에 비추어 보자면 부적절한 비판이라는 생각이 든다. 서두에 이야기한대로 셰익스피어는 극작가로써 자신이 쓴 희곡이 무대에 올릴 목적으로 썼기 때문에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보자면 셰익스피어는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기 위해 의도적이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현대 영화들이 흥행을 위해, 진솔한 스토리나 드라마 보다 화려한 CG를 과도하게 사용하는 것을 선호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여기서 잠깐, 그가 활동했던 엘리자베스1세 시대의 연극에 대한 배경지식은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기에 여러 자료들을 찾아보고 적어본다.

당시 극장은 여러가격대의 입장권을 팔았기 때문에 대중들을 끌어 모을 수 있었다. 무대주위에 서서 보는 것은 1페니 밖에 안했지만 비싼 좌석은 6팬스나 하는 것도 있었다. 입장료는 런던 노동자의 일주이리 급료의 1/12 에 해당되었기에 누구나 쉽게 살 수 있었다. 연극은 깡패, 소매치기, 창녀들과 같이 다양한 신분을 가리지 않고 입장해서 연극을 즐겼다. 심지어 입석도 있었는데, 입석의 경우에는 2시간 동안이나 서서 봐야했기 때문에 강렬한 매혹이 없고서는 대중들의 비판을 받기 일쑤였다. 어쨌거나 극장은 온갖 부류의 관객들이 한데 섞여 시끌벅적하게 떠들고 먹고 마시며 감정을 분출시키는 장소였기 때문에 당시 연극은 당시 사람들에게 삶의 활력소이자 낙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그 당시 연극은 현대사회의 영화와 같은 대중 미디어 성격을 가진다고도 볼 수 있다. 그의 전기를 보자면 관객들에게 극적 효과를 내기 위해 셰익스피어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이번 리뷰할 <햄릿>의 3막 2장에서는 셰익스피어 자신이 연극과 연기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햄릿을 통해 직접 들려주기도 한다.

“연극의 목적은 예나 지금이나 말하자면 자연을 거울에 비추어 보이는 일이지. 그 시대의 시대상과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니까” (P 75)

따라서 그의 역할은 단순한 출판/인쇄를 통해 읽히는 문학(희곡)을 쓴 것뿐만 아니라 무대라는 장소에서 대중과 호흡하고 소통 하기 위한 총체적인 종합예술을 이루어 낸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듯 싶다. 그러니 대사가 과하거나 일상에서 사용되는 대화와 이질적이라는 비난은 내게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못했다.

 

[02. 4대 비극, 햄릿]
셰익스피어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만 언급하고 4대 비극 중 하나인 <햄릿>에 대한 이야기를 써보도록 하자. <햄릿>은 셰익스피어가 만든 순수 창작이 아니라 덴마크 왕자 햄릿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상영하기 위해 만든 각색한 희곡이다. 자신의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한 주인공 햄릿 왕자의 고민과 갈등을 그리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보여주는 인간심리의 사실적이고도 디테일한 묘사들이 <햄릿>이 4대 비극안에 꼽히는 요인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이 작품은 영화, 뮤지컬, 공연 등으로 꾸준히 상연되는 단골 레퍼토리이기도 하다.

<4대 비극>을 출판한 셰익스피어연구회는 옛날 딱딱한 문어체의 낯섬에 대한 장애를 넘어 고전문학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신경 쓴 모습이 출판사의 의도가 눈에 들어왔다. 덕분에 작품에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다. (그에 반해 책의 폰트나 편집 레이아웃은 좋지 못했다) 1600년에 씌여졌음에도 불구하고 <햄릿>에 나오는 대사 하나들은 시적 표현이 가득 담겨진 인상적인 표현으로 가득했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말고도 더 좋은 표현들이 많이 있었다)

나는 <햄릿>에 대한 감상평 중 하나로 햄릿 왕자의 성격에 대한 탐구를 선택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선택이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읽어내는데 매우 의미있는 방법론이라고 생각한다. 셰익스피어의 위대함은 거기서 나오는 것이니까. 아버지 즉 선왕에 대한 복수를 위해 햄릿이 보여주는 그 과정들이 행동주의자들이 볼 때는 참으로 답답하기 이루 말할 데가 없겠지만 복수가 주는 의미 그리고 상황에 따라 햄릿이 보여주는 깊숙한 고민들은 행동주의자들과 반대편에 있는 성향을 가진 독자들과 관객들에게는 엄청난 동질감을 심어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셰익스피어의 힘이고.

한데 이런 부분은 4대 비극을 관통하는 셰익스피어의 힘이다. 정의와 목적을 이루기 위한 행동이 인간이 감정과 대립하는 그 구도에서 표현되는 갈등이 인간심리를 탁월하게 그렸냈다는 사실이 셰익스피어의 탁월함이고 그의 필살기니까.

어찌보면 복수라는 간단한 스토리인데 ‘이게 왜 대단한거야?’라는 팔짱 낀 비평적 태도로 책을 읽었다가는 햄릿이 가지는 문학적 의미를 놓치기 쉽다. 셰익스피어에 대해 전문적으로 공부하고 탐구한 이들의 해설서를 읽게 되면 ‘왜 햄릿은 이토록 깊은 고민을 할 수 밖에 없는가?’가 이해될 수 밖에 없고, 종국에는 이 작품에 대한 사람들의 칭송에 고개가 끄덕여 질 것이다. (모든 지식과 진리가 그렇듯이 문학에서도 아는 만큼 보인다. 아직까지는 내 독법이 치밀하게 작품을 분석해 내고 있지는 못함을 많이 깨닫는데, 이런 무지를 깨닫는 자체가 아주 유익한 성과이자 의미라고 생각한다. 반면 일부 해설서들은 <햄릿>에 대해 지나친 의미들을 도출하고 평가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책은 마지막 5장 1막 연인 오필리아의 죽음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클라이막스로 진행된다. 레티어스와의 결투에 셰익스피어는 반전장치를 심어 놓았고 , 그 반전장치로 인해 왕비와 레티어스 그리고 숙부인 왕이 죽고 난 후 햄릿 자신도 죽게 된다. 그 마지막 대목 즉 5장의 분량이 약간 짧아, 서둘러 마무리 짓는 듯한 아쉬움이 느껴진다. (조금 더 길었으면 좋으련만) 하지만 이는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미디어에 노출된 현대적 시각에서는 보는 시선이기에 내 스스로도 적절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400년이 지난 지금에 읽었는데도 이 반전장치가 자연스러울정도니 당시의 관객들의 놀라움은 충분했으리라.

아버지의 복수를 해야하면서도, 아버지가 죽자마자 숙부에게 재혼을 한 어머니에 대한 도덕적 타락에 대한 고민을 고민해야 하는 햄릿 왕자의 비극적 운명을 그리고 있는 작품 <햄릿>. 사실 개인적으로는 그리스 신화에 나온 ‘오이디푸스’보다 더 비극적인 운명을 태어난 사람이 있나 싶다. 자기도 모르게 자기의 아버지를 죽여야 했고 자신의 어머니와 결혼을 해야하는 운명을 타고난 ‘오이디푸스’의 삶이 내겐 더 비극적이고 문학적 의미가 크게 다가왔다.

소포클레스가 <오이디푸스왕>에서는 비극적이고도 비극적인 운명 자체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비극적인 운명에 대한 주인공의 극심한 고통과 절망감이라는 내면심리를 그려냈다는 부분을 비교해 읽으면 <햄릿>에 대한 또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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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dymiae

글쓰기를 통해 내적 평안함을 얻는 경험을 종종 하고 있습니다. 이 곳에서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진솔하게 글을 쓰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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