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일리아스

B

1.
3주라는 긴 시간 동안, 그리스 서사시를 한 편을 읽었다. 그 이름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다.

<일리아스> 안에는 성경과 삼국지에 비견할 만큼이나 징글징글하게 많은 장수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그들은 서로의 목적을 위해 싸우지만 그 싸움은 인간계로 그치지 않는다. 올림푸스 산에 있는 그리스 신들은 전쟁에 참여한 인간 중, 자신이 아끼는 인간을 돕는 것으로 트로이아 전쟁에 개입하게 되며 이로 인해 신들 역시 양갈래로 나뉘어 싸우게 된다. (물론 그 중심에는 인간 아킬레우스와 신 제우스가 위치한다)

흔히 ‘트로이’하면 트로이 목마와 아킬레우스를 떠올린다. 2004년에는 볼프강 페터젠이라는 감독이 트로이라는 이름으로 현대적 감각에 맞춘 영화를 세상에 내놓기도 했다. <일리아스>를 읽으면서 영화 <트로이>를 반복해 보며 호메로스의 원작과 비교하는 재미를 맛볼 수 있었다. 어떤 부분은 원작을 충실히 표현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대중 입맛에 맞게 잘 각색해 놓았다. (충분히 그걸만하다. 몇 천년전의 작품을 사실 그대로 재현한다가는 대중들의 따돌림을 받을테니까)

 

2.
호메로스는 <일리아스> 초반에서부터 등장인물들에 대해 많은 것들을 이야기한다. 어디서 태어났고, 누구의 자식인지 그리고 어떤 재주를 가지고 있는지, 어떤 명성을 가지고 있는지, 그 하나하나에 정성을 다한다. 예로부터 구술로 전해져온 내용들을 서사시라는 장르로 멋지게 완성시킨 호메로스 신묘한 재주에 놀랄 뿐이다. (이는 839페이지나 되는 이 책을 끝까지 읽어나가는데 있어 의지력을 발휘하게 하는 장애물이 되기도 했다)

사실 현대에서 호메로스의 독창성을 논할 때는 작품의 소재가 아니라 그것을 다루는 솜씨, 이를테면 플롯, 문체, 오묘한 표현, 인생의 깊이를 꿰뚫어보는 통찰력 따위를 논의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런 측면에서 호메로스의 <일리어드>와 <오뒷세이아>는 방대한 분량과 거창한 구상 때문에라도 짤막한 작품처럼 이음새 없이 매끈하게 이어붙인 위대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작품해설 중에서)

호메로스의 위대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호메로스는 모든 것을 다 담으려는 욕심 때문에 이야기의 초점이 흐려지거나 재미없어지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호메로스는 트로이아에서 일어난 9년 동안 일어난 일을 단 50일 동안의 사건으로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으며, 헥토르가 죽은 후 트로이아 전쟁이 일어난 기간은 단 며칠로 압축시킴으로써 사람들에게 흥미롭고 재미나게 읽혀지는 서사시로 남아 있게 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을 통해서 매우 긍정적으로 평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3.
이 책을 읽음으로써 교정된 첫번째 사실은 파리스가 헬레네와 도망치는 전쟁의 서막부터 트로이 목마가 도성 안으로 들어와 트로이아가 몰락하는 모든 내용이 <일리아스>에 담겨진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더 정확하게 이야기 하자면 트로이아 서사시는 총 8편의 서사시로 구성되어 있는며, 그 첫번째는 파리스의 심판에서 그리스군의 트로이아 도착까지를 취급하고 두번째가 이번에 읽은 일리아스이며 세번째는 아킬레우스의 죽음 그리고 나머지는 그 이후의 사건들을 시간순으로 기록했다는 점이다. (작품해설 중에서)

이야기가 점점 진행되면 될수록 <일리아스>의 신들은 사소한 이해관계 때문에 편을 갈라 전쟁에 개입함으로써 인간의 전쟁이 아닌 트로이아를 둘러싼 신들의 전쟁으로 비춰지게 된다. 심지어 신들끼리도 서로 속이고 싸우다 다치기까지 하는데, 이 부분은 책 뒷편의 작품해설에서 좋은 답변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신의 개입은 호메로스가 신들의 자의와 정의를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천병희씨는 이를 사회학적인 측면에서 고찰할 필요가 있음을 제시한다. 서사시는 귀족계급을 위한 문학이기 때문에 서사시에 등장하는 신들은 아무런 도덕적 제약을 받지 않는 자유롭고 충만한 삶을 누리는 보다 위대한 인간들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해서 귀족계급이자신들의 생활 태도를 의도적으로 이상화한 데서 비롯된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작품해설에 중에서)

좋은 해석이다. 천병희씨와 말로 그리스 문학에 관한 국내 최고의 권위자이다보니 그의 해석에 의심을 품기보다 탄성이 먼저 일어난다.

 

4.
<일리아스>의 주인공은 누가 뭐라해도 아킬레우스다. 헥토르도 굉장히 매력적인 남성이자 가정과 국가에 충실한 모범적 영웅이지만 그래도 전장의 승패를 쥐고 있는 건 살생을 위해 신에게서 태어난 인간병기 아킬레우스다. 아킬레우스는 참전하기 전 부터 자신의 죽음을 알고 있었다. 이는 어머니와의 대화에서도 많이 등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킬레우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그저 자신의 운명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뿐이다.

이에 대해 천병희씨는 다음과 같은 해석을 곁들여 놓는다.

호메로스적 인간은 외계(밖의 세계)를 향해 열려 있는데,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 자기에게 주어진 몫, 운명이라면 죽음조차 흔쾌히 받아들인다. 일리아스에서 보여지는 아킬레우스의 모습은 이를 전형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 인간은 주어진 가능성 안에서 자신이 원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 무엇이며 그것을 얻기 위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명확히 알고 행동할 뿐이다라고 말한다. (작품해설 중에서)

신이 인간을 돕기도 하고 방해하기도 하는데, 호메로스에게는 이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다만 신의 개입으로 훌륭한 인간, 용감한 인간이 되느냐 마느냐만을 문제로 보고 있다. 또 당시에 추구하는 최고의 덕목은 명성이었다. 명성만이 모든 것을 보장해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양심이라는 개념이 정립되지 않았기에 명성만이 유일한 가치 척도라고 말한다.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을 탓하지 않고 주어진 가능성 안에서 무엇이 최선이고 그것을 얻기 위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명확히 안다는 사실은 무게감 있게 다가오는 철학적 사유였고 이 질문에 대한 무게감은 꽤나 컸다.

 

5.
트로이아의 왕자 파리스에게 던져진 사과 하나로 인해 시작된 트로이아 전쟁은 결국 트로이아의 멸망을 가지고 왔다. 그 과정에서 아킬레우스와 핵토르라는 멋진 영웅들을 사람들은 기억한다. <일리아스>를 단순히 이런 줄거리를 담은 한편의 그리스 서사시로 알고 있기에는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천병희씨가 책 뒤에 덧붙인 작품해설은 호메로스와 <일리아스>가 가진 매력을 쉽게 설명하고 있어 그 유익이 무엇보다 좋았다. (부록까지 893페이지나 되는 바벨같은 이 책을 들고 다니며 꾸준히 읽은 보람이 느껴진다.)

천병희씨의 <일리아스>를 읽음으로 고대 그리스인들의 우주관과 인간관에 대해 조금 더 가까워졌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정식으로 고대 그리스 문학작품을 읽어냈다는 자부심은 1+1처럼 따라왔다.

작품을 통해 알게 된 이색적인 사항들.

A) <일리아스>에서는 반복적인 문구들이 꽤나 많이 등장한다.
이를테면, ‘훌륭한 정강이받이를 댄 아카이오이족’이라든지 ‘훌륭한 무구들이 그 위에서 울렸다’라든지, ‘어둠이 그의 눈을 덮었다’라든지 하는 문장들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이 특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무수히 많다.

B) 전투를 하다가 적장의 목을 베고 나서는 패장이 장착한 무구(Armor)에 굉장히 집착을 많이 한다는 점이다. 당연히 그렇겠지. 그 무구에는 온갖 화려하게 세공이 되어 있는 값진 것일텐데 왜 안 그렇겠는가? 현대물(영화, 소설)등에서는 그런 부분이 치졸하게 느껴졌는지 대부분 이를 표현하지 않는다.

무구라는 키워드는 작품내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며 명예와 더불어 장수들이 가장 우선시 하는 전리품이자 승리에 대한 상징물이기도 하다. 심지어 헤파이토스가 아켈레우스를 위해 만들어 준 최고의 무구를, 아킬레우스 사후에 오뒷세우스와 아이아스가 결투를 벌이기도 하니까.

무구에 대한 호메로스의 표현은 새로움을 느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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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를 통해 내적 평안함을 얻는 경험을 종종 하고 있습니다. 이 곳에서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진솔하게 글을 쓰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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