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에 대한 속상함으로 쏟았던 한없는 눈물

그날 밤 나는 영동고속도로를 운전하면서 한없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눈물을 쏟으면서 잡은 운전대 위에는 부모님에 대한 온갖 저주들이 쌓여갔습니다.
저주와 함께 나의 태생과 나의 집 그리고 나의 부모님을 원망했습니다.
나의 결혼 준비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지금의 아내와 연애를 했고, 그 연애의 끝이 오면서 자연스럽게 결혼 이야기가 오고 갔습니다.
의례 그렇듯이 남자가 먼저 아내의 집에 인사를 먼저 가게 되었지요.
처갓집은 딸이 5명 있었는데, 아내는 그 중에서 장녀였습니다.
인사를 하러 집안을 들어갔더니 벌써 대식구들로 시끌벅적하더군요.

어머님께서 차려주신 음식은 어느 잔치 만찬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의 호화스런 진수성찬을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전라도가 고향이신지라 잔칫상에는 홍어를 올려 놓으셔야 한다면서 제대로 삭힌 홍어를 올려 놓으셨고,
회사 회식 때도 먹어보지 못했던 소고기 등심구이(A+), 거기에 광어/우럭의 횟감, 국으로는 갈비탕까지…
그 집을 나설 때 나는 배부름의 통증이 이렇게까지 아픈 것인지 처음으로 경험해 보았습니다.

이때부터 모든 것이 우리 집과 비교되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남자가 여자 집에 인사를 갔으니 아내도 당연히 지방인 우리집으로 인사를 왔지요.
집은 방이 3개지만 하나는 창고로 쓰다시피 하고 나머지 한 방은 동생이 쓰고 있어 여분의 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할 수 없이 거실에서 자야 했고, 지금도 명절에 내려가면 아직도 그렇게 자고 있습니다.

집에서도 첫 며느리가 온다는 소식에 부모님께서 많이 준비하셨지만, 서울의 그 만찬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내가 아내에게 창피할 정도로. 솔직히 말하면 쪽팔렸지요.
아내도 적잖이 실망했을 겁니다. 지금도 아내는 말합니다. 당신의 모습을 보면서 그런 집안 사정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이야기는 지금부터 시작됩니다.
이후 양가 집안의 상견례가 시작되고 본격적인 결혼 준비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부모님의 욕심은 시작되었습니다.

아직까지도 우리나라에서는 집을 남자 쪽이 마련하는 것이 관례이지요.
내가 29살에 결혼을 했으니 그때가 직장 2년차 였네요.
사촌누나네 얹혀사는 나로써 그때까지 모은 돈이 아마도 800만원이 채 안되었을 겁니다.
그러나 돈 걱정 말라는 어머님의 허풍과 허례 버릇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에 어머님은 2,000만원이면 충분하지 않겠냐는 말을 하셨고
오히려 제게 욕심부리지 말고 그 가격에 적당한 집을 구하라 하셨습니다.

그 당시, 2002년 2,000만원으로는 반지하도 구하기 힘들던 때였습니다.
아내는 다행히 그런 나를, 그런 우리 집을 이해했고 자기가 10년 직장생활을 하면서 모은 돈을 합쳐주었습니다.(혼수를 하면서도 말이지요)

그렇게 합쳐진 가격이 3,500만원이었고 그 가격으로 20년 된 저층 주공아파트 11평을 간신히 구할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사정도 모르면서 되려 제게 타박을 하셨지요,

‘것 보라고 구해지지 않냐고..’

어머님은 본인이 할 일을 다하셨다 생각하셨는지 본격적인 주문을 내놓기 시작하셨습니다.
남자측 사돈들에게 해야 할 폐백리스트를 아내에게 전달하셨고, 예물을 아내에게 주문하셨습니다.
우리 부모님이 맞나 싶을 정도로 어이가 없었고, 아내도 많이 당황해 했습니다.

‘솔직히 집을 구하는 사정이 이래저래 했습니다.
그러니 형식은 간소하게 줄이고 그 돈으로 저희 신혼 집 구하는데 보탰으면 합니다’
라는 말을 드렸더니

‘너는 어른들일에 애들이 참견하는 게 아니다’
라고 말씀하시며 일언지하에 거절하시더군요.
그리고 당신 자신은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해주어야 할 예물류(보석류)를 하기 위해
오히려 다른 빚을 내는 게 아니겠습니까? 어이가 없으면 할 말이 안 나온다더니 기가 다 차더군요.

예식장소도 무조건 남자 측 장소에서 해야 한다고, 그게 도리에 맞는 거라고 다른 지역은 아예 생각조차 안 하셨습니다.
그 말을 전할 때, 난 장모님의 얼굴을 차마 쳐다볼 수가 없었습니다.
남자가 마련했다는,
20년도 더 된 11평 신혼집을 아내랑 같이 와서 집을 둘러보던 장모님의 얼굴이.
장모님께서는 저쪽 한 켠에서 딸이 고생할 걸 생각하셨는지 눈물을 훔치고 계셨는데,
그 때 그 모습의 장모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그 날 저녁 나는 부모님을 향해 윽박지르듯이 큰소리로 소리쳤습니다.
“다시는 이런 결혼 안 할거니, 그리 아세요. 절대 내 사전에 결혼은 없다구”
나는 눈물을 훔치며 얹혀살던 서울의 숙소로 향해 차를 몰았습니다.

그때가 딱 10년 전이네요.
그 때 고속도로 길에서 울었던 그 눈물이 생각납니다.
10년은 더 젊고 철 없던 청년시절의 인디가.

결혼 준비를 하면서 3개월 정도를 다툰 것 같아요.
남들은 취향 차이로 예비신랑/신부가 싸운다고 하던데, 오히려 저는 저희 부모님과 진종일 싸웠네요.
그 때 받았던 상처가 10년이 자났는데도 그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은 것 같아요.
부모님의 심정이 지금은 어느 정도 이해는 갑니다.

당신께서는 그간 여러 잔치를 다니시며 수발을 하셨고 그간 축의금만 내셨었지요.
그런 시절이 끝나고 당신이 비로서 주인공이 되는 행사가 되었으니 얼마나 기쁘셨겠어요.
그러니 그런 욕심이 안 날 수 없었겠지요..
이해는 가지만 아직까지도 공감이 안 되는 부분이 참 많네요.

그때의 부모님은 참으로 많이 원망스러웠어요.
아내에게 그리고 장모님에 대한 죄스러움 때문에 그 원망은 더 커져만 갔었습니다.
나의 아내가 고마울 따름입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이해해주고 참아주고 했던 나의 아내가.
그 아내가 지금은 내 옆에서 함께 해주고 있네요.

어머니.
이제는 우리 서로 욕심을 내려놓고 따스한 말로 서로에게 건네 보아요.
남을 의식하지 말고, 남에게 자랑하려 하지 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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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를 통해 내적 평안함을 얻는 경험을 종종 하고 있습니다. 이 곳에서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진솔하게 글을 쓰는 중입니다.

2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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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 잊혀졌던.. 잊고있던 그 때가 생각나네요..
    제라드카카 아빠가 참 많이 힘들어했구나.. 알게되었고 그시절의 나도 속상한게 있었지만 긍정적이려고 노력했던게 생각나요… 시간은 꼬박 16년을 보내고17년차를 맞이한 18년 1월 오늘…
    둘이 참 열심히 달려왔구나 하는 생각에 뿌듯 하기도 하고.. 여러 생각이 동시에 떠오르기도 합니다
    지난일은 다 잊고
    앞으로 두 개구쟁이와 함께
    더 행복하게 보내길… 희망하면서..

    독특하신 어머님이지만 이제는 미운정 고운정이
    들기도 해서 예전과는 달리 어머님이 편하니까
    제라드카카아빠는 더 이상 걱정은 안해도되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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